중국 백두산여행(2008.8)

백두산여행 1탄-

joknolja 2008. 8. 9. 10:06
 (* 고구려와 백두산천지!!)

 

백두산 여행 1탄


7월 21일  인천출발 →대련도착 → 단동숙박


지난 겨울 방학에 중국을 다녀 온지라

이번에는 다른 곳을 가고 싶었는 데

백두산 상품이 눈에 들어 왔다.

(무슨 큰 뜻을 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여행 상품 가격에 유혹 된 것이다. ㅎㅎ)

비행기도 Five Star항공사인 아시아나항공에, 백두산 천지와,

북녘땅을 가까이서 보는 감격, 그리고 역사 유적지까지.....

난, 역시 유혹에 잘 넘어간다.


이번 여행은

동료들과의 여행이다.

2년전 일본여행을 여행 할 때는 5명이었는데,

김희순이 미국으로 건너가는 바람에 4명이 뭉친 것이다.

김희순의 난 자리가 왠지 허전한 것을 보니 그동안 어지간하게

뭉쳐 다닌 것 같다.


인천까지의 차량은 막내인 원옥이 해결하기로 하였다.

어리다고 매일 뒷 치다꺼리를 시키는 것 같아 조금 안쓰럽다.

오후 늦은 비행기라 한가하다.

대련까지의 비행시간은 무척 짧다.

한시간 안에 식사와 면세품판매 등을 하려니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스튜어디스들의 움직임이 바쁘다.


저녁은

도시락.

그것도 한쪽은 밥, 한쪽은 김치볶음이다.

몇수저 뜨려는데 벌써 앞쪽부터 도시락을 수거하기 시작이다.

급하게 먹어 치운니 이번에는 면세품 신청이란다.

시간이 짧아 면세품인도는 하지 않고, 신청만 받아 다음 비행 할때 결재하면서 물품을 인수 받게 되어 있단다.

뭐가 이렇게 정신 없이 진행되나 했더니

벌써 귀가 멍한 것이 착륙 준비를 하고 있다.

거의 제주도 가는 느낌이다.


대련 공항에서 만난 가이드는

북한 병사처럼 작고, 까맣고, 억센 함경도 사투리를 쓰고있다.

서비스교육을 받아 부드럽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몸에 배어 있지 않아서 부드러움이 잘 나오지 않는다.

대련에서 저녁을 먹은 후 (에궁 비행기에서 급하게 먹은 밥이 소화 되기도 전에 저녁을 또 준다.)단동으로 출발이다.

대련에서 단동가는 길은 어둠에 쌓여 잘 볼 수 없었으나 산이 거의 없이 낮은 평지를 달리고 있기에 우리는 이 넓은 나대지가 아깝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이동을 하였는데 돌아 오는 길에 보니 그 넓은 평지에는 버려진 땅이 하나도 없이 옥수수와 벼 등이 심어져 있었다.

중국 여행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중국은 그 넓은 땅을 산이면 산, 논이면 논, 밭이면 밭 어느 것 하나 그냥 놀리지 않는 것 같다.

버스를  3시간 30분타고 단동으로 이동 하는 것으로 첫날 일정이 마무리 되었다.


7월 22일 단동 → 집안 → 통화


바깥이 시끄러워 눈을 뜨니 창밖에 보이는 광장에 새벽 5시부터 사람들이 모여있다.

한쪽은 부채, 한쪽은 검, 한쪽은 맨손체조다.

참 부지런 들도 하다.

공단같이 번쩍이는 재질의 상하 복을 입은 사람들이 제법 많다.

앞에 사부인 듯한 사람이 하는 데로 열을 맞추어 체조를 따라한다.

거의 두시간 가까이 하는 것 같다.

이후에 보니 가는 곳마다

넓은 광장이 있고

여지없이 아침과 저녁이면 새까맣게 사람 들이 모여 체조를 하고 있다.


첫 관광지는

압록강이다.

끊어진 철교는 한눈에 압록강 철교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일제가 건설하고,

6.25사변때 마오쩌뚱의 중공군 침략을 막기위해 미군이 폭파 한,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 없이 세워지고 부숴진 상흔이

우리민족의 역사를 대변하는 것 같아 숙연해진다.

 

끊어져 서 일까 압록강단교(鴨綠江斷橋)라는 안내 문구가 들어 온다.

 

6.25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는 압록강철교를 보니

왠지 모르게 뭉클해 진다.

번화한 단동에서 바라보는 신의주는 정적만이 흐른다.

 

강건너 신의주에 커다란 관람차(허니문카)가

생뚱맞게 서있는 데 가이드 말이 돌지 않는 관람차란다.

보이기위해 만들어 놓은 관람차가 북한의 현실처럼 안스럽게 와 닿았다.

 

유람선은 신의주에 거의 닿을 듯이 가까이 간다.

관광객 들로 북적이는 유람선과,

강건너 보이는 풍요로운 단동을 바라 볼 수 밖에 없는

 북한 주민이 안스럽기만하다.

결코 넓지 않은 압록강이지만 북한 주민이 넘어 올때

중국 측에서 총을 쏘아도 말을 할 수 없고

넘어오면 바로 소환된다고한다. 

북한 주민이 넘어 오면 중국이 골치가 아파서

 경계를 워낙 강하게 하기 때문에

북한 측에서는 경계 할 이유가 없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압록강변에 유난히 공안이 많이 눈에 띈다.

 

유람선을 타고 가던 중

 멀리  유럽의 고성처럼 멋진 건물이 들어선 섬이 눈에 들어 왔다.

 옆 가이드에게 물으니  월량도란다.

단동이 점점 개발의 붐을 타고 있음을 느끼면서

유람선은 출발 했던 장소로 돌아왔다.

유람선 관광을 마치고

압록강 철교의 끊어진 곳 까지 걸어 가 보고 싶었지만

 같이 간 관광객들의 호응이 없어 포기 할 수 밖에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조금 이동하니

 600년전 이성계가 4불가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수 없고,

여름철 군사 동원은 부적절하며,

남쪽의 왜구가 우려되고,

천기마저 우리 편이 아니라는)을 내세우면서 회군을 한

위화도가 눈에 들어온다.

고구려말, 고려말, 모두 자신들의 야욕을 합리화 하면서

개인적인 권력을 잡기위해 그 넓은 요동땅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니

이번 여행은 가는 곳 마다 우울함의 연속이다.

위화도에는 비교적 깨끗한 건물이 몇채 지어져 있으나

전시용인지 사람의 발자취는 보이지 않는다.

때마춰 내리는 비 때문에 바로 버스에 올랐다.

 

이제부터 긴 긴 버스여행이다.

이번 여행은 버스로의 이동시간이 무척 길다.

 

4시간 30분을 이동해야

국내성이 있는 집안으로 도착 할 수 있다.

버스로 이동도중 왠지 평범치 못한 산세가 나타났다.

호안장성으로 천리장성의 시작이라고 하는데

 마치 만리장성과도 같이 산성이 연결되어 있었다.

 

긴 버스여행 끝에 닿은 국내성이 있던 집안은

 대련이나 단동과 같은  번화 함은 없었으나,

 고구려의 2번째 수도인 만큼 고구려 역사에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첫 번째 수도인 졸본에서 유리왕이 천도를 하여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 하기전 까지 400여년을

고구려 도성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곳이다.

 

 

지금은 성벽을 감싸며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돌로 쌓은 짧은 구간이 국내성임을 설명해 주니 그려러니 할 뿐이다.

 

집안 골목길로 차가 들어서니

가이드 말이 몇 년 안 있어 중국 정부에서

집안의 고구려유적지를 되 살리기 위해

성터 안의 중국인 들을 모두 이주 시키고 유적지를 복원 할 계획이라고 한다. 중국인 들의 생각은 고구려도 그들의 소수민족역사로 해석 될 뿐이었다.

그래도 문화유적지를 가꾸고 보살핌에 정성을 다하느 것 만은

본 받아야 할 것 같다.

국내성터에서 멀리 보이는 산이 환도 산성이다.

평상시에는 평지에서 생활하다가 전쟁이 일어 나면 산성안으로 피난을 가는 형태인데 이는 이후 비사성, 졸본성에서도 볼 수 있었다.


점심식사는 북한식당이었다.

음식이 무척 맛있고, 정갈하다.

식사 후 공연은 덤이다.

소름이 끼쳐지는 높은 톤의 목소리와 정형 된 듯한 미소, 노래......

갑자기 평양을 그리던 할머니가 생각나 울컥해 졌다.

버스 주위로 몰려든 장뇌삼장수들을 피해 버스에 올랐다.

함께 간 일행 중 한 분이 2뿌리에 만원을 주고 샀다며 좋아라한다.


이제 장수왕릉을 보러 출발이다.

주차장에서 몇계단 오르니 바로 석릉(石陵)이 보인다.

아시아의 피라미드라 불리기엔 약간 규모가 작았으나

 화강암을 7단까지 정교하게 짜맞추어 반듯하게 쌓아 올린 것하며,

돌을 쌓아 올린 무덤이 빗물이나

외부 압력에 의해 무너지지 않도록

호석을 4부분에 각각 3개씩 받쳐 놓은 것 등은

그 시대의 건축기술이 뛰어 났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아야겠다.

지금은 좌측과 뒤쪽으로 계단을 놓아

석실까지 올라가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석실안에서 촬영을 못하도록 중국관리인이 지키고 있다.

석실안에는 석관자리만 있고 내부에는 고인 빗물이 뚝뚝 떨어 지고 있다.

벽화도 전혀 남아 있지 않고

단지 장수왕과 왕비의 무덤이 있었던 자리를 보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겠다.

장군총의정면은

국내성을 바라보는 서남향이며

네 귀는 동서남북을 가르키며,

석실안 석관의 머리방향이 53도로

북동쪽에 있는 백두산 천지를 향하고 있다고 한다.

 

아~~! 그런데 석실을 나오면 바로 북한 땅이 보인다.

중국산과 북한 산의 차이는 민둥산이냐 아니냐의 차이다.

북한은 산의 나무조차 땔감으로 중국에 팔아 넘긴다고한다.

이번 여행은 계속 압록강을 끼고 가기에

오른쪽에 북한 땅을 바라보며 이동하고있다.


뒤쪽계단을 내려오니 앞쪽의 보존 상태와는 달리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는 모습이 보여진다.

호석도 3개 중 1개를 도난 당했다.

각 석재들은 홈이 파여 끼워져 있었으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무너지는 것 같았다.

장군총 뒷 쪽으로 고인돌모양의 무덤들이 있는 데

1개만 모양을 갖추고 나머지는 흔적만 남아 있었다.

가이드 말로는 후궁들의 묘라고한다.


  장군총 견학 후 광개토대왕릉으로 이동하였다.

광개토대왕비에서 광개토대왕릉은 걸어서 이동 할 만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입구에는 삼족오가 그려진 옷을 입은 직원들이 매표를 하고있다.

 

 

 

광개토대왕비는 乎太王碑라고 불리우고있었는 데

(國岡上廣開土境平安乎太王碑이라는 광개토대왕 시호의 약자)

사방이 유리로 되어있는 비각 속에서 보존하고 있었다.

광개토대왕의 시호는

광활한 영토를 개척하고(廣開土境)

민생을 평안하게 보살핀(平安)

하늘과 같이 큰 왕(乎太王)이라는 뜻이다.

 

비석의 높이가 6.39미터 각 면이1.35~2미터나 되었다.

작은 유리문을 통해 비각안에 들어가니

여러나라의 지폐들이 바닥에 뿌려져있다.

 

 

얼마전 태왕사신기의 배용준을 통해

친숙해진 담덕 광개토대왕릉을 오르는 길은

우산 모양을 하고있는 우산나무가 양쪽으로 도열되어있다.

능으로가는 길에는 자두 살구등의 과수나무가 눈에 띄었고

조금오르니 자두,살구등을 바구니에 담아 파는 상인도 만났다.

능 아래쪽에는 광개토대왕자료 전시관도 있었다.

전시관에는 농가 사이에 있던

광개토대왕비와 발굴 당시의 모습등을 찍은 사진이 전시되어있었다.

광개토대왕릉은 장수왕릉에 비해 보존상태가 많이 좋지 않았고,

허물어진 능 사이에 놓여진 철계단을 통해 묘실에 오를 수 있었다.


묘실안은 유리로 막혀있고

시신을 모셨던 석판 두개만이 덩그렁이 놓여 있었다. 

 

최소한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흔적은 남아 있어야 할 터인데....ㅠㅠ

묘실안의 규모도 장수왕릉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는 데

 고구려 왕은 본인이 살아 있을 때 자신의 묘를 미리 만들어 놓는 것이라한다.

영토를 넓히기 위한 의지를 갖고 있던 광개토대왕은

자신의 묘에 큰 관심을 쏟지 않았으리라 추측된다.

 

 

짧은 담덕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내일의 백두산 등정을 위해 통화로 이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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