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 구채구
올 겨울 방학은 가까운 동해여행만 하자고 하였는데 나도모르게 인터넷 검색을 하다보니 구채구 상품이 저렴한 가격에 나온 것을 발견 하였다. 그것도 크리스마스날 출발이다. 야~~호! 앞 뒤 안가리고 예약하였다.
12월 25일 출발이다. 아이들이 큰 후 부터는 남편과 둘만의 여행을 다녔는데, 이번에는 딸과 엄마와 함께 동행하였다. 공항은 한가하였다. 항상 성수기에 북적거리던 여행이었는 데 한가한 공항은 왠지 낯설다. 출국심사도 빨리 끝나고 gate앞도 한가하다. 아시아나 비행기는 국내선 만큼이나 작은 것이 대기해있다. 출발을 알리는 안내 멘트가 나왔는데 좌석이 텅비어 있다. 거의 전세기 수준이다. 총 탑승객 인원이 23명이란다. ㅎㅎ
다니다보니 이런 비행기도 다 타본다. 왠지 느낌이 묘하다. 써빙도 바로바로! 기내식도 바로바로 !! 완전 VIP대접이다. 편안히 청두(성도)공항에 도착하니 젊고 예쁜 가이드가 웃음으로 맞이 해 준다. 성도는 복잡하고, 무질서하다. 유비, 제갈공명, 장비,관우의 숨결을 느끼기 전에 중국의 무질서함이 먼저 느껴진다. 중국식 저녁은 다행스럽게도 샹차이향이 덜나고, 음식도 맛있다. 밤에는 호텔에서 제공한 명주솜이불을 깔고 포근하게 잘 수 있었다.
12월 26일 오늘은 새벽부터 이동이다. 아침에 호텔에서 제공한 도시락을 받고 히터가 조금밖에 가동이 안되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려니 힘이 든다. 중국의 도로는 화물차가 너무 무겁게 짐을 싣고다녀서인지 아스팔트 곳곳이 패여있다. 덕분에 거의 비포장 수준이다. 점심식사 후 또 다시 이동....... 조금 지나니 고산지대에 진입한다. 차마고도를 통해 TV에서 보았던 산꼭데기에 난 오솔길이 계속 이어진다. 민강대협곡을 끼고 절벽사이로 난 편도 1차선 길로 버스는 열심히 달린다. 차선이 어찌나 좁은지 반대차선으로 화물차가 지나가면 절벽으로 떨어 질 것같다. 지형을 보니 삼국지의 영웅들이 협곡으로 군대를 몰아넣어 몰살시킨 것이 이해된다. 민강 곳곳의 물줄기는 막아서 수력 발전소를 건립해 놓고 일부는 지금도 공사 중이다. 화물차가 많이 다니는 이유도 곳곳에 진행되는 발전소 건립과 도로 공사로 인함이리라.
척박한 산비탈은 흙이 조금만 있어도 밭농사를 짓고 있다. 이 추운 날씨에도 쏟아져 내릴 듯한 산비탈로 유채와도 같은 야채잎이 파랗게 덮고있다.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산꼭데기에도 여지없이 집이 들어서 있고, 밭을 경작하고있고, 양과 말과 염소와 소를 키우고있다.
또 특이한 것은 곳곳에 망루가 보이는 것이다. 이 산꼭데기에서도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기위한 망루를 곳곳에 세워 놓은 것이다. 지금은 옥수수와 같은 식량 저장고로 사용되고 있었다.
예전에 전쟁시 흰돌을 적에게 던지라는 계시를 받고 흰돌을 찾아 전쟁을 하였더니 적들이 흰돌을 맞으면 상처가 아물지 않아 강족이 승리 할 수 있었다는 유래로 인해 이 들에게는 흰 돌이 액을 물리치는 의미가 되었단다. 강족마을을 끼고 꽤 오랜시간을 달린다. 차창밖으로 강족 특유의 민속의상을 입고 광주리로 나무땔감을메고 가는 모습과 신정을 준비하기 위함인지 돼지를 잡고있는 모습, 양을 모는 목동의 모습이 펼쳐진다. 이동하는 긴 시간이 차창밖을 보느라 지루하지 않다. 오후2시30분경 우리의 첫 번째 여행지인 모니골 자갈폭포에 도착하였다.
차에서 내려 땅에 발을 딛고 몇걸음 움직이니 숨이 가빠온다. 이곳의 해발은 3500m. 고산병이 나타나는 첫 번째 증후인가? 계단을 조금 오르니 숨이 너무 가빠오면서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다. 엄마와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원시림을 돌아가니 산 전체가 물바다다. 골짜기 사이로 이렇게 많은 물이 어디서 흘러오는 것인지. 곳곳이 층층을 이루면서 폭포를 이루고 있다. 숨만 조금 덜차면 경탄을 마지 않을텐데 유네스코에 등재된 모니골은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다. 자갈폭포까지 헉헉거리면서 겨우겨우 걸어서 도착하였다. 산소를 공급하고 가야지 숨이 끊어질 듯하다. 폭포꼭데기 까지 가보자는 가이드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열개를 오르는데 아파트 10층은 오르는 느낌이다. 중간쯤 가다가 엄마가 더 이상 못가시겠단다. 이미 일행 중 2/3이상이 탈락하였다. 꼭데기에서 바라보는 자갈폭포의 느낌은 또 다르다. 웅장한 폭포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고 얼른 내려와 버스에 오르니 숨찬 증세가 가라앉는다. 혹독한 첫 고산병체험을 마쳤다.
버스에서 내내 떠들면서 기분을 내시던 아저씨 한분은 얼굴이 하얗게 된채로 완전히 쓰러져 계셨다. 내일 구채구도 해발이 비슷하다고하여 가이드로부터 고산병약을 구입하였다. 모니골을 출발하여 구채구로 이동하는 길에는 오색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어 티벳민족이 사는 지역에 들어 섰음을 알게 하였다.
흰색은 구름, 붉은색은 태양, 푸른색은 하늘, 황토색은 땅, 녹색은 나무를 의미하며, 여행객들의 안녕을빌어 주는 의미이기도 하다고 한다. 어둠이 짙게 내린 6시가 다 되어 호텔에 도착하였다. 이동도중 고산지대에서 몇 번 내려, 사과도 사먹고 야크를 타고 사진도 찍은 시간을 빼고도 거의 8시간은 이동한 듯 하다. 방에서 짐정리를 하다보니 고산지대를 입증이라도 하듯 과자포장, 커피믹스포장등이 거의 터질 듯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있다. 비수기라 그런지 넓은 호텔이 스산하게 느껴질 정도로 투숙객이 안보인다. 내일의 여행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밤에 몇 번을 깨었다. 후에 가이드에게 들으니 그것도 고산지대에서 나타나는 한 증세란다.
12월 27일 오늘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구채구여행이다. 조금 여유있게 8시에 호텔을 출발하였다. 구채구 입구에는 팬더곰의 상징물들이 세워져있다.
이곳이 과거에는 팬더 서식지였단다. 구채구는 9개의 장족(티벳족)이 살고 있어 붙여진 지명이란다. 이곳도 환경오염 때문에 관광지에서는 천연가스로 가는 셔틀버스만 운행하도록 되어있다. 입장료를 지불하고는 구채구내에서 수시로 이동하는 어떤 셔틀버스든지 탈 수 있었다. 워낙 넓고 볼 것이 많은 지역이라 하루에 모든 것을 보기에는 무리로 보인다. 특유의 민속의상을 입은 안내 아가씨들이 셔틀버스에 동행하여 안내를 하지만 아쉽게도 중국말을 못 알아 들어 답답하다.
다행스럽게 우리 가이드가 마이크로 설명해 준다. 114개의 호수, 47개의 샘,11개의 급류,15개의 폭포로 이루어진 구채구는 엄청나게 큰 규모로 우리일행을 맞이해 주었다. 구채구는 두개의 코스로 구성되어 있는데 운전기사가 어느쪽으로 먼저 갈지는 가이드도 모른다고 한다. 우리는 오른쪽길인 일측구코스를 먼저 보게 되었다. 먼저 셔틀버스에서 내린곳은 천아해이다. 골짜기사이로 바다와 같은 큰 호수가 자리잡고있다.
영화 영웅의 촬영지란다. 촬영때 지은 누각도 환경을 오염시킨다고 중국정부에서 철거하였단다. 자연을 보호하는 중국정부의 노력은 본 받아야힐 것같다. 구채구 특징인 옥색의 물빛 안쪽에 나무가 투명하게 비추인다. 그 나무는 죽지 않고 물위로 생명이 이어져 다시 자라나고있다.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건축해. 이곳은 장족의 민속옷을 입고 사진을 찍는 곳이 있었다. 1인당 10위엔을 3명에 20위엔으로 흥정하고 옷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조금 더 내려와 팬더가 살았다는 팬더해를 본 후 식사 장소로 이동하였다. 구채구내에 있는 유일한 식당이라는 데 1층은 기념품상가, 2층은 뷔페식당이다. 이곳 음식은 독특한향이 너무 진하다. 가이드 말로는 이곳의 산초라고한다. 1층의 기념품상에서 딸아이가 친구 들에게 줄 목걸이와 목도리, 페시미나등을 구입하였다. 중국쇼핑은 깍는 재미가 솔솔하다. 점심 식사를 한 후 나이아가라를 축소한 듯 웅장한 낙일랑 폭포를 보고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왼쪽코스로 올라 갔다. 측사와구의 제일 윗 부분에 위치한 장해는 구채구내에서 가장 해발이 높은 곳으로, 울창한 삼림 사이로 난 짙은 남색의 호수는 장엄함 그 자체였다.
장해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한 오채지는 스카이 블루색의 잉크를 물에 풀어 놓은 듯하다.
그 수많은 호수의 색이 각각 다르고, 호수 안의 물 빛도 햇빛에따라 제각기 다른 색이다.
장해와 오채지를 본 후 마지막 코스인 수정구 지역을 보았다. 40여개의 호수가 연결되어 7Km가 넘는 계단식 호수의 물이 흘러들어 살아 있는 듯한 물줄기가 인상적인 수정폭포, 호랑이 모습이 비춘다는 노호해, 호수에 비친 노을의 색이 한송이의 불꽃같은 화화해, 19개의 수정같이 맑은 크고 작은 호수들의 모임인 수정군해 , 구채구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인 서우해 , 용이 물속에서 꿈틀거리는 와룡해 등등 ( 이곳의 호수는 모두 바다 海로 명명되어져 있다.)
어쩜 그리 폭포마다, 호수마다, 글로 표현 할 수 없는 장관이 펼쳐져 있는 것 일까.
마지막은 구채구 안의 장족마을을 돌아 보는 것이다. 이 마을 안에는 장족들이 생활하면서 각종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그들의 생활 상을 잠사나마 가까이서 볼 수 있느는 것에 의의를 두면 될 것 같다. 장족의 어린이들은 유난히 볼이 빨개서 마치 양 볼에 빨간 볼터치를 일부러 한 듯한 얼굴이었다. 처음에는 동상으로 인해 붉어진 것으로 알았으나 이는 공기가 맑은데다 강한 직사광선으로 인해 붉어 질 수 밖에 없다고한다. 또 하나, 장족 들의 모습을보면서 이 맑은 물과 함께 살면서 왜 목욕을하지 않고 지저분 하게 사는지 의아 했다. 참고로 티벳인은 평생에 출생, 결혼, 장례식 이렇게 3번 목욕을 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단지 게을러서가 아니란다. 그들에게는 수장(水葬 - 물에 시체를 띄워 보내는 제사) 문화가 있다. 주로 고아나 과부 또는 현세에서 한이 많았던 사람들이 생을 마감하면 그 영혼을 자연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수장을 한다. 이렇게 수장을 하여 물에 띄워 보내면 언젠가는 물고기들이 먹게 되는데, 그들은 이것을 자연으로 귀의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로인해 장족들은 물고기에 그 영혼이 스며든다고 믿어 그런 물고기가 사는 물 역시 신성한 것이라고 여긴다. 자연 앞에서 겸손한 장족, 이들은 물과 물고기를 모두 귀중히 여기며 숭배한다
티벳인 들의 장례풍습 또한 특이했다. 어린아이가 사망하면 水葬(수장)을 지내는 풍습... 그래서 생선을 잘 안먹는다고 하며 어른이 사망하면 정상적인 埋葬(매장)을 하고, 스님이나 유명인사들은 火葬(화장)을 지낸다고 한다
일부 티벳본토 쪽에서는 天葬(천장)을 지내기도 하는데 친절하게도 칼, 도끼등으로 시신을 조각내어 새들이 먹기 편하게 해준다고도 한다. 후에 살펴보니 고산지대에서는 매장을 하여도 시신이 썩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풍습이라고한다. 조금 잔인하기도한 장례 풍습을 들었지만 구채구의 물 만은 잊지 못할 것 같다. 두고 오고 싶지않은 구채구의 맑은 물을 뒤로 하고 고산지대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12월 28일 아침에 눈을 뜨니 고산지대에서 잠을 자서인지 얼굴이 보름달처럼 부어 있다. 남편이 티벳여인의 얼굴이 되었다고 놀린다. 오늘은 또 다시 성도로의 귀환을 위해 버스로 대 이동을 해야 하는 날이다.‘ 갔던 길로 다시 가서인지 이동하는데 조금 덜 지루하다. 오늘의 유일한 관광지인 송판에 들렀다.
티벳의 송첸감포왕과 당태종의 양녀인 문성공주의 커다란 동상이 송판에 도착 했음을 알려준다. 이 높은 고지에 제법 큰 도시가 형성되어있다. 7세기 송첸감포왕이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화해 조건으로 시집간 문성공주였지만 당나라와 티벳족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한족과 티벳족의 우호의 화신 역할을 한 문성공주는 지금도 이곳에서 크게 존경을 받고 있다고 한다.
송판은 고산지대여서인지 칼바람이 불고 있었다. 복원 한 듯한 성안으로 제법 아늑한 마을과 깨끗한 상점이 들어서 있는데 사방을 둘러보니 높은 산이 둘러싸여 있어 천연의 요새였다.
이곳에서의 자유시간은 티벳과 중국이 어울려져 있는 잘 정돈 된 마을을 감상 할 수 있는 기회였다. 차창밖의 풍경은 갈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내다 보고 있을때 문득 나의 눈에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사람이 들어왔다. 세상에!! 차 안에서도 이렇게 춥고 힘겨운데 차도 다니기 좁은 아스팔트위에 온 몸을 내 던지는 고행을 하는 저 들의 신앙심에 경건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이 자연의 순수함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무슨 교만과 어리석음을 참회 하겠다고 그런 고통을 결행하고 있단 말인가! 이 장거리의 버스여행은 정말 여러 가지를 생각 할 수 있는 귀한 기회이다. 가끔 지루해 질때면 고산지대의 작고 볼품없지만 정말 맛있는 사과를 사먹고, 때론 망루에서 내가 내려가야 할 엄청난 높이에 꼬불꼬불나 있는 길을 내려다보면서, 때론 차마고도와 같은 높은 산길을 가방하나 메고 학교를 다니는 작은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또 때론 양을 모는 목동의 여유로움을 보면서 길고 긴 버스여행을 마치고 복잡한 문명의 한 복판인 성도로 귀환했다.
12월 29일
오늘은 삼국지의 한 가운데로 들어와 제갈량, 유비, 관우, 장비를 만나는 날이다. 아침에는 성도에서 2시간 거리의 낙산으로 이동하여 낙산대불을 보러갔다. 낙산은 마치 우리나라의 홍도와도 같이 돌과 땅의 흙이 모두 �은 색이다. 고속도로로 이동하는 데 산이 온통 차밭이다. 대나무도 제법 크게 자라있었다. 낙산대불을 관람하기위해 배에 올랐다.
우리가 내내 끼고 다녔던 민강, 그리고 창의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낙산대불은 당나라시기인 713년부터 해통법사가 릉운산 절벽을 깍아 만들기 시작하여 해통법사가 죽고 난 뒤인 90년이 지나서야 완성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불상이 하나의 산이요 산이 하나의 불상이란 말이 전해 내려 오듯이 대불의 높이가 14.7m, 귀길이 6.72m, 코길이 5.33m, 눈썹 두께가 24m 나 된다고한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석불상이란다. 배에서 바라보는 석상은 규모가 너무커서 불상의 발톱 밑에서 관람하는 사람의 모습이 개미와도 같이 작은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불상을 새긴 불심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낙산대불을 보고 난 후 선착장 바로 앞에 있는 재래시장을 구경하였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 같다. 먹고, 입고......
특이한 점은 생고기를 좌판에 벌려 놓고 옛날 추를 놓고 무게를 측정하던 방법으로 잘라서 팔고 있었다. 우리나라 순대와 비슷한 것도 만들고 있었는 데 내용물은 순전히 고기로만 채우고 있었다. 야채가게, 생선가게, 기념품상을 돌아보는 재미를 맛보고 성도의 무후사를 보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였다. 무후사는 삼국지의 중심 축인 제갈량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사당이다.
촉을 세우기위해 한 시대를 거느린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과 그 외의 28위의 문 무관의 동상, 유비의 묘인 혜릉,이 있는 곳이다. 무후사에 도착하니 제갈량의 특징인 부채를 나풀거리며 제갈량 복장을 한 사람이 정문에 서있다.
조금있으니 사병이 와서 군사보고를 하고 곧 많은 사병들이 의식을 행한다. 의식행사가 마치기 전 무후사로 들어갔다.
먼저 양쪽에 세워진 문장, 서법, 석각이 뛰어나다는 제갈량의 충과 덕을 기리는 명비와 삼절비라 불리는 당비를 본 후 공명이 모든 것을 걸고 위(魏)나라와의 일전을 도모하기 전 작성했다는 출사표(出師表) 앞에 섰다. '지금 멀리 떠나며 표(表)를 대하니 눈물이 나서 더 이상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는 결구로 끝을 맺는 출사표는 고금을 통틀어 최고의 명문으로 꼽힌다. 제갈량을 만나러 가는 길은 양쪽으로 늘어선 문무관의 동상중 왼쪽의 무관쪽을 통해서 갔다. 노장이면서도 끝까지 싸움에 나가 밀리지 않았던 황충의 동상을 보니 반가웠다. 사실 제갈량이 얼마나 황충의 나이로 약올리면서 전쟁에 나가 승리하게 하였던가?
무관의 동상 끝에는 장비가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장비의 고약한 성질을 의미 하듯 얼굴을 검게 만들어 놓았다. 가운데에는 황금색의 넉넉한 표정의 유비상이 있고 오른쪽에는 충의 화신인 관우 상이 있었다. 관우에게는 그의 충을 기리는 중국인 들이 왕의 모자를 씌워주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에는 유비보다 관우의 충성심이 더 높게 기려지는 것 같았다. 이제 드디어 제갈량의 사당이다.
지금도 무슨 책략을 꾸미고 있는 듯하다. 이곳에서 가이드에게 제갈량 부인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비록 얼굴은 추녀이나 재주가 뛰어난 제갈량의 부인은, 제갈량의 부채 안쪽에 하루의 일정을 세세하게 적어 놓아 제갈량의 내조를 확실히 하였단다. 재갈량의 부채부치는 모습은 그 일정을 보여 주지 않으려고 안쪽으로만 부친단다. 중국 내에서 재상이면서 부인을 한명 밖에 두지 않은 이도 제갈량 한사람 뿐이라나? 제갈량상 옆에는 제갈량이 직접 제조 했다는 제갈북이 있는 데 낮에는 밥을 짓고 밤에는 경보를 발했다고한다. 제갈량을 본 후 유비의 묘를 관람하였다.
유비의 묘를 만나러 가는 길은 예쁜담장길이었다. 어쩜 이리도 운치있게 만들었던지. 마치 삼국지 시대로의 여행을 떠나는 느낌이었다. 한번도 도굴 당한 적이 없다는 유비의 무덤은 자그마했고, 무덤위로 나무도 자라고, 풀도 무성했다. 중국인 들은 무덤에서 자라는 것도 신체의 일부로 생각한다고 한다. 혜릉을 벗어나 조용한 정원을 거니는 것으로 성도 구채구의 여정을 마무리하였다. 비록 비수기에 추위에 떨면서 이동한 여행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속에서 떠밀리 듯 다니는 여행과는 또 다른 의미를 맛본 이번 여행은 나에게 또 다른 추억을 안겨 주었다. |